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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부정공>영모재기(永慕齋記)
永慕齋記 不佞忝宰順天下車之日首訪邑之望族於鄉父老成以玉川趙氏爲對趙氏之先在勝國圭組燀爀至諱瑜號曰虔谷事親孝有至行是時士大夫喪其親者百日即吉惟公與圃冶二先生行三年之制進士文科官至副正迄于革命之日自貫鄉虔谷遯于順之謙川 本明累徵以高爵並不就杜門以終後 世宗表其閭曰孝子前副正趙瑜之門盖示忠孝雙全之意也 肅廟丙戌南士通章太學建祠于謙川以爼豆之以其子兵使公諱崇文孫諱哲山配食焉兵使父子當 光廟之世與六臣之亂並及於禍 先廟己亥特命旌閭後又設壇從享於 魯陵之側嗚呼我列 聖廟崇報之典至矣盡矣而趙氏家三世忠孝何其盛歟斯奚但一鄉建數間齋舍以爲瞻依矜式之所顔其楣曰永慕噫三公忠孝大節可以與圃冶並名成朴同傳具載於 國乘邑誌暨先輩著述發揮而表章之雖千百之遠猶當式其閭而慕其名顧何事於齋爲哉雖然慕其名不如慕其德慕其德將以師其人詩不云乎永言孝思孝思維則思慕也凡爲三公之後者盍各顧名思義此齋之所以作也遂書此以昴趙氏之徵余文者 安東 金鼎均 謹識 영모재기(永慕齋記) 내가 순천부사를 배수 받아 도임한 날, 처음 군 내에 이름이 있는 씨족을 고을 유지들에게 물으니 모두들 옥천 조 씨라고 대답하였다. 조 씨의 선세에 고려조에 큰 벼슬을 지낸 건곡 선생 유(瑜)가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지극한 행실이 있었는데 이때에 사대부가 어버이 상을 당하면 백일 만에 탈상하는 것을 옳게 여기되 오직 공은 포은(圃隱), 야은(冶隱) 두 선생과 더불어 三년의 예제를 행하였다. 진사 문과로 벼슬이 부정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망하매 관향(貫鄉) 순창(淳昌)을 떠나 순천 겸천으로 내려 왔던 것이다. 본조(本朝)에서 여러 번 높은 관직으로써 불렀지만 나아가지 아니하고 외부와 인연을 끊은 채 세상을 뜨니 뒤에 세종(世宗)께서 문을 표하되 효자전부정조유의 정려라 하였으니 대개 충효쌍전(忠孝雙全)의 뜻을 보인 것이다. 숙종(肅宗) 병술년(一七0六)에 남쪽 선비가 태학에 통장(通章)하고 사우(祠字)를 겸천에 세워 향사하고 그 아들 병사공 숭문(崇文)과 손자 철산(哲山)을 배사하였다. 병사 부자는 世祖 때에 사육신의 의거에 참여하였다가 함께 화를 입고 정조(正祖) 기해년에 특별히 정문을 명하고 뒤에 또 단을 만들어 노릉(魯陵) 단종(端宗)의 곁에 종향(從享)하였다. 아!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높이 값은 은전이 지극하고 극진하며 조 씨 집 四세 충효가 어쩌면 그리 성대하단 말인가. 이 어찌 한 고을의 영망일 뿐이겠는가. 비록 한 나라의 영망이라 해도 가할 것이다. 조 씨의 후손이 경향(京鄉)에 흩어져 사는 자의 수가 더욱 번성하고 순천에 있는 자 또한 수백 호로 공의 三세 정분 곁에다 두어 칸 재사를 세워 앙모하여 의지하고 삼가 본보기로 삼을 곳을 만들어 놓고 그 문지방 위에 액호를 걸되 영모라 하였다. 아! 三공 충효 대절은 가히 포은 야은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고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과 같이 전하여 함께 국사와 읍지(邑誌)에 싣고 또 선배가 저술 발휘(著述 發揮)하여 표장(表章)하였으니 비록 천백 년 뒤에라도 마땅히 그 정문에 구부리고 그 이름을 생각할 것인데 재(齋)를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그 이름을 사모하는 것이 그 덕을 사모하는 장차 그 사람을 스승으로 대접할 것이다. 「시경」에 말하지 않았던가. 『길이 효도하기를 생각하매 효도 생각이 벼리와 법이 된다.』고 생각함은 추모하는 것이니 무릇 三공의 후손 된 자 어찌 각기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재를 지은 것이다. 마침내 이와 같이 기록하여 내게 글을 청한 조 씨를 권면(勸勉)하노라. 安東 金鼎均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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